처서가 다가오는데도 찜통더위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하늘은 연일 구름에 가려 우중충하다. 오늘은 오래전부터 벼루어 왔던 원효 구도의 길을 드디어 걸어보기로 한다. 원효 구도의 길은 동산계곡에서 하늘정원까지 이어지는 길로 네이버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사실상 팔공산의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산성봉(북봉 혹은 1213봉)에는 공군 사이트가 자리하고 있고 그 한쪽에 하늘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군부대 인근까지 차량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비로봉까지의 최단 코스로 종종 이용되기도 한다.
원효 구도 1주차장에서 도로를 건너면 원효 구도의 길 들머리가 바로 보인다. 주차장 입구에 있는 지도에는 오도암까지 1시간, 오도암에서 하늘정원까지 20분이라고 되어 있다. 너무 쉬울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들어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뿐했지만 곧이어 큰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길은 등린이 출입금지다. 오도암에서 하늘정원까지 끝없이 계단이 이어지는데 정말 뒤지는 줄 알았다.
동산계곡
초반에는 거의 산책로에 가까운 완만한 길이 이어지고 조금만 걷다 보면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는데 바로 동산계곡 최상류이다. 오는 길에 보니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가 동산계곡 곳곳에 남아 있었고 폭우가 내리던 당시 익사 사고가 난 탓에 계곡 진입을 못하게 막아 놓은 곳이 상당히 많이 보였다. 동산계곡에 관한 건 아래 링크를 참고 바란다.
아무튼 기대하지 않았던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등산할 수 있어 너무 기분이 좋다. 고도가 꽤나 높은 곳인데도 물이 내려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대구 시내 기온은 34도를 넘나들 정도의 폭염이었지만 여기는 숲이 너무 울창하여 30도 이하를 유지하는 듯했다.
계곡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있어 잠시 내려가 보았다. 암반을 타고 흐르는 맑은 물 속에 발 담그고 더위 식히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러나 물놀이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간다.
상쾌한 계곡과 숲길이 이어지고 신기하게 자라는 나무를 지나면 또 한 번 계곡물과 만나게 된다. 여기는 아까보다 계곡 접근이 훨씬 쉽다. 그냥 가로지르기만 하면 된다. 이후 목교가 하나 나오는데 거기서부터 오도암까지 물길이 보였다 안 보였다를 반복하다가 오도암에서 완전히 끊긴다.
오도암 0.7km 이정목을 지나서 계속 올라가다가 정자 쉼터가 보이면 오도암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정자 쉼터에서는 조망이 살짝 보이지만 만족스러운 정도는 아니다. 정자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사진 상에서 익히 보아오던 오도암 입구가 눈앞에 나타난다.
원효가 창건한 오도암
오도암의 백미는 일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왠만한 시골에서도 볼 수 없는 사립문과 한글로 '오도암'이라고 써진 편액이 걸린 일주문은 자연 그대로의 미를 살린 듯 소박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문 한쪽에는 참배객 외 출입을 삼가해 달라는 안내문이 걸려있다. 그렇게 오늘만 참배객이 되기로 하고 들어가 본다.
무심하게 쌓아올린 돌탑을 지나면 청운대를 병풍삼은 오도암의 멋진 자리 앉음세가 펼쳐진다. 대웅전과 요사채로 보이는 건물 등 단 네 채로 구성된 오도암의 절 배치가 배경을 장식하는 청운대와 산성봉 덕에 다른 어떤 절간보다도 웅장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오도암은 팔공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가 아닐까 싶다.
아쉬운 점은 현재 오도암은 중창불사 중이며 마당에 쌓아놓은 자재로 인해 고즈넉함을 느끼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공사가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원효굴과 하늘정원
오도암을 나와서 팔공산 하늘정원으로 향한다. 오도암에서 하늘정원까지는 0.8km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문제는 계단이다. 청운대 측면을 따라 놓인 이 계단은 극악의 경사도를 자랑(?)하며 끝없이 이어진다. 멋 모르고 갔다가 된통 당한 꼴이다.
정말로 한계에 다다를 때 쯤 원효굴과 하늘정원으로 가는 갈림길에 당도한다. 올라가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도대체 이 계단은 어떻게 설치한 걸까?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이런 곳에 안전한 산행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신 얼굴을 알 수 없는 분들께 다시금 감사드린다.
1. 원효굴
원효굴이 있는 곳부터 먼저 가본다. 우측은 청운대의 절벽 바위, 좌측은 산성봉과 비로봉 등 팔공산의 주능선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원효굴 가기 전, 청운대 절벽 앞에 사람을 닮은 길쭉한 바위 하나가 위태롭게 붙어있다. 약간의 힘만 준다면 바위는 그대로 떨어져 버릴 것만 같다.
산성봉에서 치산계곡 방향으로 뻗어내린 기암절벽은 현기증 나도록 아찔하고 그 바로 너머에 위치한 비로봉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날씨가 좋지 않아 전방 시야가 답답하긴 했지만 원효암에서 보는 팔공산의 자태는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원효굴은 청운대 정상 바로 아래, 깍아지른 절벽 가운데 뚫려 있어 나무데크가 놓이기 전에는 접근이 쉽지 않았다. 원효굴은 사람 한 명 누워도 남을 정도로 꽤 길게 뚫려 있고 바닥은 바위틈에서 배어 나온 물이 고여있다. 원효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는 이야기가 민간에서 전승되어 오며 원효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굴 안쪽으로 들어가서 밖을 내다보고 싶었지만 물이 생각보다 많이 고여있어 안쪽 깊이 들어갈 수 없었다. 진짜 원효가 여기에 기거하며 깨닳음을 얻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굴 안에서 바깥은 바라보면 왠지 모를 신비로움과 영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2. 팔공산 하늘정원
아까 보았던 갈림길에서 300m만 가면 하늘정원이다. 하늘정원 가는 길 곳곳에는 사진촬영 금지 안내문이 붙어있다. 어디까지 허용이 되는지 알 수 없어 최대한 군부대가 보이는 쪽으로는 피해서 사진을 찍었다.
레이더 기지 한쪽에 조성된 하늘정원은 정원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삼국유사 조형물과 정자 건물 외에 별다르게 꾸민 건 없다. 군 기지가 들어선 곳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그늘 하나 없이 무척 더울 것 같지만 실제 고지대라 그런지 아래쪽보다 기온이 낮고 시원한 바람이 무척이나 많이 불어준다. 정자 건물 위에 올라가니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육중한 청운대의 풍경이 더해져 더없이 시원하다.
하늘 정원 한쪽 끝에는 비로봉과 팔공산 능선을 관찰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고 망원경 하나가 설치되어 있다. 비로봉 꼭대기에 삐죽하게 솟아있는 통신탑들이 참 흉물스럽다. 팔공산은 정상부를 구성하는 봉우리 중 두 개의 봉우리에 인공 시설물이 들어서 있어 주변 경관을 해치고 있다.
하늘정원에서 비로봉까지 가볼까 했지만 너무 무리를 하는 것 같아서 그만 하산하기로 한다. 최근에는 산을 가도 몸을 너무 혹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딱 적당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게 무리하게 돌아다니는 것보다 만족감이 큰 법이다.
청운대 가는 길
돌아가는 길에 올라올 때 보지 못한 청운대 정상 가는 길을 발견했다. 약 100m만 가면 되는 길이라서 잠시 들렀다 가기로 한다. 초입 수풀을 지나나 마자 돌담만 남은 집터가 나온다. 이런 산꼭대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지인데 화전민 집터일까?
청운대 정상 가는 길 중간중간에 절벽 쪽으로 빠지는 길이 나있다. 산성봉과 비로봉, 그리고 팔공산 주능선의 파노라마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청운대 정상 가운데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 위에 멋지게 뿌리를 내리고 있고 그 앞에 청운대 정상석이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바위 위에 걸터 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한참을 쉬다가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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