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진산 팔공산의 기억
과거 대구에 갈 곳이 없던 시절에 주말이면 팔공산으로 대구 사람들 다 몰린다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고 그만큼 팔공산은 대구를 대표하는 산이자 랜드마크였다. 그러다 달성군이 대구로 편입되고 비슬산이 점점 유명해지면서 대구의 산은 팔공산과 비슬산이 양분하게 되어 등산객도 많이 분산된 것 같다.
나조차 요즘 대구 근교 산행을 할 때 비슬산으로 향하는 횟수가 늘어 갔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좋은 산, 하지만 오랜만에 찾은 나에게 팔공산이 준 인상은 역시나 명불허전, 대구의 진산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이번의 좋은 기억으로 인해 팔공산에 가는 일이 좀 더 많아질 것 같다. 못 가본 곳도 많고, 그만큼 팔공산은 넓기도 하니 말이다.
1. 수태골에서 서봉으로
들머리를 어디로 할 지 고민하다 결국 가장 만만한 수태골로 정했다. 수태골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출입이 금지되기 전까지 주말에는 일찍 가지 않으면 주차가 불가능할 지경이었으나 지금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어서 너무 좋다.
수태골 코스는 초반에는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여 폭포까지는 편안하게 오를 수 있다. 맨날 동봉으로만 올라 이번에 서봉에 가보고 싶어 부인사 코스를 고민했으나 산행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수태골로 왔는데, 내 기억이 왜곡된 건지 서봉으로 가는 길이 없다. 분명 서봉, 동봉 이정표를 보며 고민한 것 같은데. 하긴 그때가 벌써 20년도 넘은 거 같다. 할 수 없이 오도재까지 가서 능선을 타고 서봉을 찍은 다음, 왔던 길을 되돌아와 비로봉으로 가기로 한다.
주차장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문화재인 수릉봉산계 표석을 만나게 된다. 자연석 바위에 '수릉봉산계'라고 음각된 이 표석은 조선 23대 왕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능인 수릉과 연관이 있다. 수릉이 이곳 팔공산에 있는 건 아니다. '봉산'이란 나무의 벌채를 금지한다는 것으로, 이 둘을 종합하면 이곳은 수릉의 조성에 사용될 어떠한 목재를 구하는 장소였으며, 벌채를 금지하고 출입을 금하는 표석이 곧 수릉봉산계 표석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수릉봉산계 표석 옆에는 정자 하나가 지어져 있으나 여기서 쉬어가는 사람은 거의 보질 못했다.
2. 암벽 바위와 수태골 폭포
계속 가다보면 암벽 등반 훈련을 하는 커다란 암벽바위가 나타난다. 수태골에는 암벽 훈련장이 여기 말고도 더 있지만 이 바위가 가장 거대하고 육중하다. 매끈한 바위를 올려다보니 아찔한 기분이 든다. 계단과 흙길을 반복하며 등로는 이어지고 길 옆으로는 계곡물이 흘러내려간다. 이렇게 가물었는데 수태골은 그래도 물이 꽤 내려오는 편이다. 드디어 수태폭포 가는 길에 이르고 옆 계곡 방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알고 보니 등산로로 계속 가도 계단을 통해 폭포로 내려갈 수 있다. 괜한 고생을 쩝..
아무튼 수태골폭포는 비가 좀 많이 와야 멋진 폭포수가 떨어지는데 날이 가물어서 물줄기가 가늘다. 그렇다 해도 수태골폭포는 멋지다. 비록 팔공폭포(공산폭포)나 명연폭포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수태골폭포는 팔공산을 대표할 만한 폭포 중 하나이다. 수태골은 꽤 높은 지대까지 물길이 계속 이어지는데 수태골폭포는 그 마지막쯤에 위치해있다고 보면 된다. 수태골폭포를 지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는 잦아들다가 곧 완전히 사라진다.
폭포를 지나서 삼거리가 나오는데 메인 등로를 따라 계속 가면 동봉이고, 자세히 보면 좌측으로 꺾어 들어가는 길이 있다. 그쪽으로 가면 서봉(정확히 말하면 오도재)으로 가는 길이다. 수태골 탐방로는 등산로 정비가 매우 잘 되어 있어서 편안한 산행을 할 수 있지만 이쪽은 아니다. 너덜 지대이며 경사도가 꽤 있고 돌길의 연속이라서 걷기가 고달프다. 약 1km를 걸어 드디어 오도재에 닿는다. 우측으로 가면 동봉, 좌측으로 가면 서봉이다. 서봉으로 먼저 간다.
3. 서봉에서 보는 환상적인 조망
서봉으로 가는 동안 비로봉과 동봉, 청운대 그리고 노적봉, 팔공CC 쪽으로 이어지는 동쪽 능선이 계속 조망된다. 암산인 팔공산은 동쪽은 암릉이 발달해 있고, 서쪽은 비교적 육산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서봉 쪽도 겉으로 잘 안 보여서 그렇지 그 속에는 암릉이 꽤 많다. 그래서 암릉 산행하시는 분들은 서쪽 능선인 가마바위봉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번에 서봉을 처음 가보고 알게 된 사실은 비로봉과 동봉의 조망은 서봉에서 보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이날은 비교적 시계가 준수한 편이어서(완전히 깨끗하지는 않았다) 팔공산의 경치를 감상하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었다.
서봉에 도착, 서봉은 두 개의 바위 덩이로 정상 공간이 매우 협소하다. 두 개의 정상석에 하나는 삼성봉, 하나는 서봉이라고 새겨져 있다. 동봉과 서봉의 정상석은 매우 단순명료하다. 옛날에는 싫었지만 지금은 다른 어떤 거창한 정상석보다 이게 더 좋다. 그리고 서봉의 원래 이름은 삼성봉, 동봉의 원래 이름은 미타봉이다. 소싯적에는 왜 봉우리 이름을 이렇게 멋없이 지었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서봉에서의 팔공산이 멋지게 조망된다. 팔공산은 정상부 조망이 너무 좋은 산이다. 날이 좋아 비로봉과 동봉, 그리고 그 뒤쪽에 북봉(1213봉)이 또렷이 나타난다. 다른 방향으로는 환성산과 초례봉, 케이블카의 종착지인 신림봉과 팔공산 남사면, 신무동도 훤히 내려다 보인다.
서봉 정상석 뒤쪽으로 암릉이 계속 이어지고 봉우리 이름은 모르겠으나 능선을 따라 삐죽삐죽하게 튀어나온 기암괴석이 너무 멋지다. 그쪽으로 다가가고 싶지만 비로봉과 동봉으로 가야 하기에 얼른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다시 한 번 정상부 조망을 감상하며 삼성봉 정상석을 찍고 거기서 육중하고 거대한 청운대의 멋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본다. 청운대 아래에는 원효굴과 오도암이 있고, 군위 쪽에서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아쉽지만 군부대 시설 때문에 청운대 정상은 갈 수 없는 곳이다.
4. 슬픈 비로봉 (feat. 팔공산 마애여래좌상)
이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 비로봉을 거쳐 동봉 쪽으로 간다. 오도재 기점을 지나 삼거리에서 팔공산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왼쪽으로 간다. 팔공산은 경주 남산 다음으로 많은 불상이 조각된 산이며, 정상부에는 이 마애불과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 두 석불상이 존재한다.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바위가 보이고, 관목이 우거진 계단을 지난다. 신기하게도 이곳 정상부에는 아직도 분홍색 진달래가 펴 있었다.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바위도 정말 멋지고, 부처님의 조각도 정말 아름답다.
왼손에 둥근 약함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추정하며, 조각 상태가 아주 또렷하고 섬세하다. 불상이 새겨진 바위의 위치 등으로 보아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연상시킨다. 최소 보물 문화재 같지만 대구시 유형문화재이다. 이곳에서의 조망을 감상하다가 다시 비로봉을 향해 이동한다.
점점 비로봉의 방송국 통신탑이 가까워지고 철조망 앞에 다다른다. 가까이서 보니 철조망과 통신탑이 매우 흉물스럽다. 비로봉 정상은 원래 일반인 접근이 허용되지 않았다가 2009년 개방되었다. 비로봉이 개방되기 전까지 팔공산 정상은 동봉이 대신해왔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비로봉도 정상이 아니다. 비로봉보다 북쪽에 있는 레이더 기지인 북봉이 1213m로 사실상 팔공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그런데 급격하게 아래로 꺾이는 데다 길이 좁고 삐죽삐죽한 철조망이 좌측이 바로 붙어있는 이곳의 내리막이 너무 위태롭다. 만약 여기서 구르기라도 한다면 뭐 하나 부러지는 것과 동시에 철조망에 몸이 걸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될 것만 같다. 점점 비로봉 정상이 가까워지고, 송신탑과 부대시설, 전깃줄 때문에 주변이 너무 어지럽다.
비로봉 정상석은 자연석에 글자를 새겨 만들어 놓았다. 정상부가 좁고 주변의 송신탑과 철조망 때문에 경관이 썩 좋지 못하다. 그래서 비로봉 정상은 정이 가질 않는다. 팔공산 정상은 흉물스러운 저 공군 사이트와 송신탑이 전부 다 망쳐놓고 있다. 여건 상 다른 곳으로 이전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원래는 정상부가 이렇게 좁지 않은데 저 흉물들로 인해 산 정상은 공구리가 쳐져 있고,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비로봉을 내려와서 공군 사이트 기지와 청운대를 카메라에 담아본다. 이렇게 멋진 풍경에 난간 앞 철조망이 폐허가 되어 너무 보기 싫다.
비로봉 근처는 황폐화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산 정상은 인간의 손이 닿아 한 번 황폐화되면 그것이 복구되기까지 몇 백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비로봉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어서 너무 안타깝다.
5. 팔공산 최고의 조망, 동봉을 향하여 (feat.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
이제 마지막 일정인 동봉으로 향한다. 당연하지만 동봉은 비로봉에서 내려와 서봉 반대 편으로 가야 한다. 이정표가 있으니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동봉 도착 몇 백 미터 전에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약사여래입상은 6m의 바위면에 고부조로 새겨진 불상으로 제작연대는 미상이나 개인적으로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신라시대의 작품에 비해 미적으로 퇴화된 상태이며 손 모양이 많이 부자연스럽다. 부처상이기보다는 보살상으로 보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보살상이 여성화되었듯이 이 불상도 여성적인 이미지가 강하다.
동봉으로 가는 마지막 피치는 계단이 많아 고달프다. 그래도 돌이나 바위를 타고 오르는 것보다는 그나마 계단이 쉽다. 이런 면에서 팔공산은 등산로 정비가 잘 되어 있는 편이다. 동봉에 도착하면 커다란 암봉 위에 정상석이 세워져 있고 작은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동봉에서는 팔공산의 거의 모든 산줄기가 조망되고 비로봉과 청운대 등 정상 봉우리의 경치가 정말 좋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대구 시내와 비슬산, 날씨가 정말 맑을 때 가야산까지 조망된다.
서봉에서 동봉까지 경험한 팔공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도 손색없을 정도로 멋지다. 물론 흉물인 철탑과 군부대가 눈의 가시이지만 그것을 상쇄하고도 충분할 정도로 경치가 좋고 보너스로 불상까지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팔공산 국립공원화는 많은 사유지 때문에 사실상 요원해 보인다. 호남 사람들이 힘을 모아 무등산을 국립공원화시켰듯이 대구 경북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사유 재산 침해로 반대 집회를 여는 것만 봐도 별로 기대가 안 된다.
6. 케이블카 종착지 신림봉으로 하산
이제 하산을 할 시간, 하산은 철탑사거리에서 낙타봉, 신림봉, 탑골 쪽으로 하기로 한다. 염불암에 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포기했다. 이쪽으로 내려간 이유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갈지 자꾸만 고민이 되었기 때문이다. 동봉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 좌회전, 또 좌회전해서 내려가면 철탑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라고 하지만 하나는 비법정탐방로라서 사실상 삼거리다. 아무튼 여기서 케이블카 방향으로 진행한다.
군데군데 계단이 놓여져 있지만 끊임없는 내리막 돌길이라서 발이 정말 아프다. 내려가는 동안 계곡 건너 염불암과 병풍바위, 염불봉, 먼 쪽 능선에 능바위, 노적봉, 남방아덤, 북방아덤이 계속해서 조망된다. 이름은 붙어 있지 않지만 조망바위도 여러 군데 있어 경치 구경하면서 내려가기 좋다.
낙타봉에 도착, 따로 비석은 없다. 뒤에서 보면 바위가 크지 않아 보이지만 반대편으로 돌아가면 꽤 크다. 여기서는 케이블카가 있는 신림봉이 아주 잘 보인다. 신림봉 뒤로는 환성산과 초례봉이 보이고, 그 너머는 흐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낙타봉의 바위는 가운데 틈이 벌어진 뾰족한 바위가 세워진 형상인데 왜 낙타봉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알 길이 없다.
계속 내려가서 팥재에 도착, 신림봉으로 가는 계단이 보인다. 오늘 거쳐가는 마지막 오르막 계단이다. 케이블카가 있는 신림봉에 도착하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동봉과 병풍바위가 조망되는 익숙한 풍경, 여기서 잠깐의 휴식을 가진 후,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갈지, 걸어갈지 고민하다 결국 걸어간다.
신림봉에서 내려오면 크고 거대한 바위 하나가 나타난다. 주위가 마사토라 미끄러우나 바위 뒤로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동화사가 살짝 보이고 약사여래대불의 뒷모습이 보인다. 팔공산 하산길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조망점이다.
이제부터는 비교적 편안한 육산이 이어지고 깔딱고개를 지나면 탑골(팔공산자연공원)로 내려선다. 차량 회수를 위해 팔공3번을 타야 하지만 배차시간이 맞지 않아 그냥 수태골까지 걸어갔다. 여기서 수태골 주차장까지는 약 30~35분 정도 걸린다.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과 팔공산온천관광호텔을 지나 기분 좋지만 고된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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