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남해도를 오랜만에 다녀왔습니다. 남해도는 안 가본 데 없을 정도로 구석구석 다녀봤는데요, 더 좋은 풍경을 보기 위해 이제는 등산을 시작했습니다. 경남 남해는 국내 섬 가운데 산지 비율이 가장 높은 섬이고, 어느 산이건 정상에 오르면 예외 없이 환상적인 남해바다 조망을 보여줍니다.
호구산의 원래 명칭은 원숭이를 뜻하는 납산이며, 호구산의 뜻은 호랑이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지형도에 호구산이라는 명칭은 없으며 납산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또한 납산은 송등산, 괴음산과 함께 하나로 묶어 호구산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최고봉은 납산으로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습니다.
들머리는 남해 3대 사찰 중 하나인 용문사로 하고, 정상에서 돗틀바위와 앵강고개를 경유해 용문사로 돌아오는 약 8km의 여정은 결론부터 얘기해서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난이도입니다. 사면은 대체로 육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능선은 대부분 돌로 이루어져 산행을 피곤하게 만들고, 데크와 같이 편함을 보장하는 구조물이 최소화된, 날 것 그대로의 등산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미국마을로 들어가서 안으로 쭉 들어가면 큰 주차장이 있는데 거기에 편하게 차를 댈 수 있습니다. 저는 좀 더 들어가서 용문사 일주문 앞에 주차했습니다. 용문사 절 안에도 별도의 주차장이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일주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다 보면 천왕각이 보이고 등산로와 절로 들어가는 길이 갈립니다. 호구산 등산만 하실 분은 등산로로 바로 올라가면 되고, 용문사 구경을 먼저 하실 분은 절 안으로 들어가서 빙 둘러서 가면 백련암에서 등산로와 만나게 됩니다. 저는 절 구경을 먼저 하고 올라갔습니다.
용문사는 남해에서 가장 큰 절로 생각보다 여러 문화재들이 많습니다. 보물 2점과 수 점의 지방 유형문화재, 문화재자료 등이 있는데, 대웅전, 천왕각, 명부전과 탱화 등의 지정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절의 크기는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공간 효율이 좋고 건물들이 균형 잡힌 배치를 보이고 있어 호젓하면서 예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단지 계속되는 공사로 인해 현재 대웅전 뒤편이 많이 어수선합니다.
**여기서 중요
백련암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이정표에 좌측은 백련암과 호구산, 우측은 염불암으로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둘 다 호구산 정상으로 가는 길입니다. 좌측 길은 멀리 돌아서 망봉을 거쳐 능선을 타고 정상으로 가고, 우측 길은 염불암을 지나 정상으로 바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염불암 쪽 길은 비추천인 게 거의 내려 꼽는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경사가 심합니다. 내려올 때만 이용하는 것이 좋겠고, 참고로 저는 내려올 때 염불암으로 안 가고 돗틀바위를 지나 앵강고개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왼쪽길은 네이버 지도에 표기되지 않은 등산로이니, 네이버 지도 보지 마시고 길 따라 계속 가면 됩니다. 저는 별생각 없이 가다가 네이버 지도 상에서 호구산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고 길을 잘 못 든 줄 알고 두 번 오르락내리락하는 멍청한 짓을 했더랬죠. 이렇게 초장에 힘을 빼는 통에 이날 등산이 더 힘들었습니다. 등산 앱 켜고 가시거나 지도 보지 마시고 길 따라 그냥 쭉 가세요. 이 길이 그나마 오르막이 덜 가파르기는 하지만 봉우리에 닿기까지 섬산 특유의 쉬지 않고 이어지는 된비알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정표가 없어서 긴가민가 하겠지만 시그널도 많고 외길이라 샛길로 빠질 일은 없습니다. 된비알의 마지막에 거대한 암봉이 출현하는데, 바로 첫번째 봉우리인 망봉입니다. 직벽에 가까운 바위를 타고 넘어가야 하지만, 밧줄을 잡고 올라가면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조그만 바위를 사용해 임시로 만들어 놓은 정상석이 보입니다. 금산, 노도, 설흘산, 앵강만이 시원하게 조망됩니다. 망봉 조망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더 대단한 남해의 한려해상 경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능선을 타고 납산으로 향합니다. 급경사는 사라졌지만 돌부리가 많아져서 걷기에 조금 불편해집니다. 관목숲을 헤치고 계속 나아갑니다. 관목 사이로 납산 정상이 한번씩 얼굴을 내밉니다. 그리고 능선을 걷는 동안 자연석을 쌓아놓은 것을 계속 보게 되는데 아마도 과거에 쌓은 산성의 흔적 같습니다. 안부를 지나서 정상에 가까워지면 다시 오르막이 시작됩니다. 납산 정상 역시 거대한 암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가운데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역시나 기어가다시피 바위를 타고 넘어가야 합니다. 호구산에는 계단 따위 없습니다. 양손, 양발 사용해서 기어 올라가야 합니다.
드디어 정상! 한폭의 그림 같은 남해의 한려해상이 사방으로 펼쳐집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고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듭니다. 대기가 흐려서 사진은 잘 안 나오지만, 실제로 눈으로 보는 게 훨씬 아름답습니다. 정말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고, 떠나기가 싫어집니다. 사진을 아무리 찍어봐도 성에 차지 않습니다. 앵강만 주변은 물론이고 남해읍 너머 망운산과 설천면, 바다 건너 창선도까지 모두 조망됩니다.
왜 호구산이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는지 그 가치가 증명되는 풍경이라 할 수 있으며, 파스텔톤의 신록으로 뒤덮힌 산 역시도 너무 예쁩니다. 아래쪽에 용문사가 내려다보이고 신록의 숲과 편백나무가 어우러져 이채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정상에서 염불암 방향으로 바로 하산할 수도 있으나, 봉수대 뒤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섭니다.
첫 번째 이정표에서 석평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갑니다. 용문사 방향으로 가면 염불암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바로 내려가려면 용문사 쪽으로 가면 됩니다. 이후 석평 쪽에서 앵강고개 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조망점인 돗틀바위를 지나가다 보면 임도와 닿게 됩니다.
암봉으로 이루어진 돗틀바위에서 보는 조망 역시 경치가 정상 못지않게 환상적입니다. 정상보다 낮은 고도에서 보는 조망은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또 다른 맛이 있습니다. 바위 끝에 서니 오금이 저리고 아찔합니다. 바람이 너무 거칠게 불어 아주 조심조심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돗틀바위까지의 능선은 작은 암릉 구간으로 험하고 아찔하지만 지루할 새가 없습니다. 다만 발 헛디뎌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엉치뼈 날아가는 건 한 순간일 거 같아 정말 조심해서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릉 구간이 지나가면 드디어 부드러운 육산의 모습이 드러나고, 편백숲이 이어지다가 임도와 만납니다. 임도로 내려서면 이제 거의 다 내려왔다고 보면 됩니다. 용문사 2.4km라고 되어 있지만 평탄한 내리막이라서 힘들지 않습니다. 몇 갈래 갈림길이 나오는데 계속 우측으로 진행하면 됩니다. 참고로 여기는 공원묘지 지역이라서 밤에 지나가기에는 좀 거시시 할 거 같네요. 드디어 용문사 일주문이 보이고 8km의 여정이 끝을 맺게 됩니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데 유리 천장 아래 직박구리 한 마리가 앉아서 지저귑니다. 실수로 들어와서 나가지를 못하는 건지, 안 나가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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